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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벌 풀꽃세상을 만나다 (선정회의 참가 후기) |
| 글쓴이 : 흰벌
날짜 : 06-09-28 19:08
조회 : 9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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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풀꽃 세상을 위한 모임'이란 단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1년 여름이었다. 그해 여름 지리산에 갔다가 실상사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돌 위에 새겨진 풀꽃상 상패를 보고서였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사람도 아닌 개울가에만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물봉선에게 상을 주다니... 풀꽃에게 상울 줄 기발한 생각을 한 것도 놀랍고 그런 단체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물봉선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다. 지리산의 물봉선이 풀꽃상을 받을 무렵 지리산 댐을 막기 위한 계획이 추진 중이었고 그를 막기 위해 무수한 환경단체들의 노력이 이어졌으며 풀꽃세상에서도 그 노력의 일환으로 풀꽃상을 드리게 된 것이었다.
물봉선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다. 자연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은 자연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최상의 자연사랑법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째서 나는 남부터미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지난 며칠 사이, '제 12회 풀꽃상 선정회의'에 초대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몇 번인가 받았고 풀꽃 세상 사이트에 들어가 확인까지 했건만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양재역이 아닌 남부터미널 역에 내려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며 7번 출구를 찾았지만 남부터미널 역엔 7번 출구가 없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고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더니 양재역이란다. 이런 낭패라니! 이미 시간은 출발예정 시간을 넘어버렸고 부리나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에 내려 겨우 풀꽃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풀꽃세상의 일군 얼떨풀님이 내 소개를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흰벌님이시죠?'하고 반겨주었다. 거 참, 내 얼굴에 꽃가루라도 묻었나?
다행히(?) 나보다 더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차는 1 시간쯤 늦게 부안을 향해 출발을 했다. 풀씨명이 적힌 이름표를 받아 목에 걸고 그 이름에 기대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풀꽃세상에서는 모든 회원들을 '풀씨'라고 부르는데 저마다 이름 대신 풀씨명을 부른다. 변산바람꽃,사자의 이빨, 방랑꽃, 얼떨풀, 하늘보라. 나도풀.재용풀... 초등학생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존경심으로 한데 어울려 가는 동안 끈끈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서해바다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낙조가 드리운 변산반도를 지나며 나는 새로이 만난 풀꽃세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저마다 간단한 자기 소개와 풀꽃상 선정회의에 참가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야기 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멀리 제주에서 왔다는 하늘보라님과 사자의 이빨님의 열정에 내심 감탄하면서 풀꽃세상과의 만남을 망설이던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풀꽃 세상을 알기 전 다른 환경단체에서도 활동을 했다는 사자의 이빨님은 1년 전부터 제주로 귀농하여 감귤농사를 한다고 했다. 숲 해설가로, 환경지킴이로 활동하는 사자의 이빨님에게 호의를 느낀 건 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사자의 이빨이란 풀씨명이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자의 이빨(dande lion)은 민들레의 영어명이다. 민들레의 이파리가 사자의 이빨을 닮은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소슬바람이 불고 있었다. 천변에 무리지어 핀 익모초와 작은 들꽃들을 지나, 껑충한 키의 수수밭머리를 돌아 우리는 풀꽃상 선정회의 장소인 부안생태문화활력소에 닿았다. 먼저 도착하여 행사준비를 하던 회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저마다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모두 분주하기만 한데 나는 건물 한 켠에 서 있는 호랑가시나무 생각으로 골똘해졌다.
호랑가시나무는 감탕나무과에 속하는사철 푸른 나무로 변산반도가 자람터 한계선이다. 부안 도청리의 호랑가시나무 군락은 호랑가시나무가 자연적으로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지역으로 식물분포학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주로 전남 남해안과 제주 서해안에서 자라는데. 잎 끝이 가시처럼 되어 있어서 호랑이의 등을 긁는데 쓸만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열매는 9·10월에 빨갛게 익는데, 겨울철에 눈속에서도 붉은 빛을 띠어 관상수로서 제격이며, 성탄절 장식으로도 많이 사용한다. 지구 온난화로 강화에서 강릉까지 올라간 탱자나무처럼 우리가 환경지키기에 소홀하면 머지않아 호랑가시나무도 한강을 건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자 행사 준비로 모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풀꽃 세상의 활동을 담은 기록사진들을 줄 위에 걸기도 하고 역대 풀꽃상을 수상한 자연물들의 사진을 벽에 나란히 전시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아 크레파스로 커다란 전지 위에 풀꽃 세상을 그리기도 하면서 회의장은 금세 풀꽃세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특별히 일거리를 찾지 못한 나는 회의장 입구 한 켠에 전시해 놓은 풀꽃 공책과 풀꽃티셔츠를 기념품 삼아 하나씩 샀다. 풀꽃 공책과 풀씨 티셔츠는 풀꽃세상의 수익사업 품목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풀꽃세상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물을 보았다. 풀꽃세상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담겨진 영상물은 새내기인 내가 풀꽃세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상물에 이어 변산바람꽃님이 풀꽃세상에서 드린 1회부터 11회까지의 풀꽃상의 의미와 현재를 꼼꼼히 되짚어 주셨다. 풀꽃세상은 여느 환경단체와 많이 다르다. 머리띠를 두르고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지도 않는다. 다만 새나 돌, 꽃같은 자연물에게 상을 드림으로써 새 한 마리, 돌 하나, 꽃 한송이가 담고 있는 자연의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자 할 뿐이다. 깊은 강물이 소리없이 흐르듯 풀꽃세상은 그렇게 조용하게 자연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이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이 바윗돌을 굴린다는 것을.
케익 위에 촛불이 켜지고 회의에 앞서 별금자리님의 사회로 작은 음악회가 시작되었다. 하안거를 풀고 방금 산을 내려온 스님같은 별금자리님은 퉁소를 기막히게 불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로는 지금은 귀농하여 토마토 농사를 짓는다는데 예전에는 청학동 동자맨치로 길게 댕기머리 땋고 허리춤에 퉁소를 차고 다니던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고 했다.
비잉 둘러앉아 차례대로 자기 소개와 감회를 이야기 한 뒤 제주에서 오신 하늘보라님의 해금 연주로 음악회의 문이 열렸다. 음악선생님이신 하늘보라님은 바이올린을 전공하셨다는데 해금소리가 좋아 따로 국악원에서 배우셨다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해금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래 전에 읽은 이향아의 시를 떠올렸다.
저렇게 생겼구나 해금 소리는
흔드는 듯 우는 듯 자즈러지는구나
<청산별곡> 몇 고갠가 숨어 사는 짐승이
세상 물정 몰라서 순한 사슴이
어느 날 느닷없이 미칠 것 같아
짐대 위에 올라가서 켤 지도 모른다던
해금 소리가 저렇게 생겼구나
세상 다 잃고서 숨 못 쉬는 사내 하나
나 같은 게 무슨 사랑이냐고
산에서 살까,
바다에 살까
술에 잠겨 아예 버릴까 싶던 목숨
더듬는 말끝마다 그 환한 부끄러움
저렇구나, 해금 소리
고려 사내의
조선 사내의
울음 소리가
저렇게 생겼구나
- 이향아의 '저렇구나, 해금소리' -
통기타를 끌어안고 목청 높여 노래하던 이대리님의 열창과 별금자리님의 퉁소가락에 부안의 가을밤은 뜨거워지기도 하고 그윽해지기도 하면서 세상은 푸른 달빛에 촉촉이 젖었다. 잰걸음으로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밤하늘엔 자리바꿈을 시작하는 별들이 총총했다.
동강의 비오리나 보길도의 갯돌, 지리산의 물봉선 같은 새나 돌, 들꽃같은 자연물에 상을 주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풀꽃상 선정회의에 오면서도 나는 다분히 낭만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풀꽃세상에서는 상을 준다고 하지 않고 드린다고 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자 인간과 자연이 등가를 이루는 평등사상에 기초한다. 야생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예전엔 알지 못했던 자연의 가치를 새삼 확인하면서 자연스레 환경 보호에도 관심이 생기긴 했지만 내 관심의 대부분은 치기 어린 낭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반 십년 넘게 야생화에 영혼을 팔았으니 이제는 꽃에 대해 한두 마디 보탤 수도 있겠다 싶어 풀꽃상 후보를 추천해달라는 말에 덜컥 고마리를 올려 놓은 것은 선정회의에 꼭 참석하겠다는 내 나름의 의사 표현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선정회의 사회를 보기 위해 제주에서 올라온 사자의 이빨님이 풀꽃상 선정을 위한 회의 진행 방법과 선정 방식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올해 추천된 13개와 지난 해 탈락했던 후보까지 합하여 모두 17개의 자연물을 놓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풀꽃상은 만장일치제 선정되는 만큼 모든 회원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질 때까지 끝장 토론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동안 11번의 풀꽃상을 선정하는 동안 날을 꼬박 새운 적도 여러번 있었다고 했다.
나도 고마리풀을 추천했던 까닭에 고마리풀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나는 고마리풀에게 풀꽃상을 드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대신 추천철회 발언을 해야만 했다. 그 까닭은 나보다 앞서 자신이 추천한 후보에 대해 설명하는 회원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오랜 고심 끝에 후보를 추천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 비해 나의 추천 사유는 너무도 즉흥적이었고 치기가 어려 있었다. 고마리풀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진지한 토론은 점점 열기를 더해가고 새벽 세 시쯤이 되어서야 '토종씨앗'이 제 12회 풀꽃상으로 선정되었다. 추천되었던 후보 모두 풀꽃상을 수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우리의 토종씨앗에게 제 12회 풀꽃상을 드리게 된데 대해 기쁨을 나누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로 마음의 합일을 이루어내는 일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회의를 끝내고 뒷풀이로 벌어진 막걸리 파티, 별금자리님이 퉁소에 막걸리를 들이 붓더니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그 애잔하고도 야리야리한 가락이 바람 앞의 촛불인 양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잦아드는가 싶으면 다시 살아나곤 하는데 달빛 아래 나앉은 듯 심산유곡이 따로없지 싶었다. .시간은 물같이 흐르고 이야기는 꽃잎처럼 떠서 시간을 타고 떠다녔다. 어느 여울목에선 나도 흥에 겨워 노래 한자락을 뽑기도 했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쫑끗 세우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몇 년 만이던가.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이렇게 날밤을 새워 본 것이.
풀꽃상 선정회의를 성공리에 마친 뒤라서였을까?
하얗게 밤을 새웠음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무언가 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한 성취감이 풀씨들의 얼굴 표정에서 읽혔다. 운동장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잠시 동심에 젖어 옛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굴렁쇠를 굴리며 동구 밖을 내닫던 어린 소년은 어느덧 머리에 하얗게 무서리 내려 앉은 중년의 사내가 되어 운동장 끝까지 달리지도 못하고 도중에 주저 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고, 굴렁쇠는 비칠비칠 거리다가 풀밭으로 몸을 눕힌다. 그 만큼의 세월의 간극이 느껴졌다.
생태문화활력소 중앙 벽면엔 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들, 새만금 갯벌을 지키기 위해, 갯벌에 사는 수많은 목숨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싸웠던 우리 이웃의 얼굴들이다. 사진 속엔 어린 학생도 보이고 주름 가득한 할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새만금 방조제는 이미 물막이 공사가 끝나 갯벌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데...
하룻밤을 지샌 생태문화활력소를 떠나 계화도로 가기 위해 배낭을 지고 걸어 나오는 길, 수수밭 머리를 돌아 나오며 흰옷 입고 죽창 든 동학군들이 잔뜩 모여들어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 했다는 어제 보았던 백산 생각이 났던 것은 하늘을 찌를 듯 뻗은 수수대궁 때문이었을까? 머리띠 두른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계화도로 가는 길에 해창개펄에 잠시 차를 멈추었다. 새만금 간척 공사에 반대하고 개펄을 살리려는 풀씨들의 염원을 담아 백합조개에게 제 5회 풀꽃상을 드렸던 그 자리에 다시 선 것이었다. 두개의 목장승 사이에 새겨진 풀꽃상패가 비바람에 색이 바랜 채 장승뻘을 뒤로 하고 해풍에 떨고 있었다.
물길이 끊기면서 뻘이었던 장승벌은 모래와 자갈로 가득 들어차서 쇠뜨기 같은 풀들로 덮혀 있다. 이 곳에 장승과 솟대를 세워 새만금갯벌을 살리고자 했던 환경미술가 최병수씨는 지금 위암 투병 중이란다. 그가 만들어 세운 70여 개의 장승과 솟대들, 그리고 '하늘로 가는 배' 도 죽어가는 개펄과 함게 조금씩 썩고 있는 듯 했다.
언제 다시 이 곳을 찾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 풍경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곳의 장승도, 솟대도, 개펄도 모두 사라지고 전혀 생경한 풍경이 나를 맞을지도 모른다. 하여도 우린 기억해야만 한다. 사라진 갯벌을 살리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의 외침이 있었다는 것을, 갯벌의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손에 못이 박히도록 끌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며 장승을 조각하고 솟대를 세운 마음시 고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계화도의 갯벌 배움터 '그레'에 들러 계화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레'란 갯벌을 긁어 조개를 캘 때 쓰는 도구의 이름이다. 예전에는 조개를 캐는 일은 주로 아낙들이 해서 '남편없이는 살아도 그레없인 못산다'는 말이 생겨났을만큼 이 곳에선 그레는 아주 중요한 작업도구라고 한다. 새만금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끝난 뒤로 이상하리만치 백합이 많이 난다고 했다. 개펄이 마지막 보시라도 하는 모양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토박이 주민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김양식장을 손을 보아 만든 갯벌 배움터 그레의 방 한 구석엔 백합조개 껍질들이 신문지 위에 나란히 엎어져 있다. 백합조개는 조개껍질의 무늬가 백이면 백이 모두 달라서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계화도의 특산물 중의 하나이기도 한 백합조개는 이 곳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라고 했다. 개펄이 사라지면 백합조개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해창에서
박영근
거기에 늘 어스름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던
부둣머리 선창이 있었다
거기에 갯물에 쩔어버린 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홀몸 조개미 아짐
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감나무가 있었고
흉어철이 들수록 밤이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집이 있었다
지금은 폐항도 아닌
신작로만 간신히 살아 나를 불러 세우는 마을
바닷속으로 비
이백년 나이를 꺾어버린 팽나무
영당(靈堂)자리에 비
수십킬로 뻘을 질러 간다는 저 방조제 끝이 어딘지를 나는 묻지 않는다
타는듯 붉은 노을이 내려
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
온통 환하게 몸 속을 열어보이던 그때를 찾아 천천히 걸어들어갈 뿐이다.
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
갯벌을 건너
(출전:현대문학 01년 6월호)
갯벌 배움터 그레의 한쪽 벽엔 이 곳을 다녀간 이들이 적어 놓은 짤막한 소망들이 어지럽게 적힌 커다란 전지가 붙어 있다. 흔적을 남긴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뻘밭 위를 힘겹게 기어간 백합조개의 발자국이거나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조개미 아짐의 흔적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계화도 원주민이자 풀꽃세상의 회원이기도 한 계화도 고구마풀씨님은 참으로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새만금 공사가 계획되고 추진되던 때 정부에서 나눠준 보상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돈인 줄만 알고 넙죽 받았던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고 했다. 비록 가진 것 없어도 갯벌에만 나가면 돈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지천이어서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는 계화도 사람들은 이제 조개를 잡기 위해 개펄이 아닌 물 속에서 조개를 잡는다고 했다. 지난 7월, 조개잡이를 나갔다가 바뀐 물길에 갯고랑에 빠져 세상을 뜬 아내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았으련만 계화도에 머무는 내내 고구마님은 풀꽃세상 회원들을 챙기느라 잠시도 쉬질 않았다.
그가 들려주는 갯벌 이야기는 아팠다. 이야기 도중 간간히 새어나오는 그의 한숨은 고스란히 가슴에 얹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살아 있는 것치고 눈물겹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이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고 있노라면 엄벙덤벙 살아온 내 지난 날이 부끄러워 농게처럼 뻘 속으로 숨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큰 슬픔을 지닌 그에게 건넬 말이 선뜻 떠오르지도 않았고 어떤 말을 건넨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내가 한 일이라곤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준 것 뿐이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은 온통 꽃길이었다. 여름꽃과 가을꽃들이 자리바꿈을 하느라 다양한 종의 꽃들이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내며 길목마다 지키고 서 있어 경사가 제법 급한대도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산꼭대기엔 돌로 쌓은 봉수대가 있어 그 위에 오르니 새만금과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계화도 간척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은 십여년 전 울릉도 성인봉을 올랐을 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지는 이 근사한 풍경 속에 들어서도 마냥 즐거울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계화 간척지를 에워싸고 흐르는 동진강과 그 뒤로 만경강이 보이고 해무 저 편에 금강이 있다고 했다.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서 물길이 바뀌고 개펄은 사막화가 급속히 진행 중이란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개펄엔 이미 모래가 많이 밀려 들어와 있었다. 개펄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든 새만금 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나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든 분명한 것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개발은 얼핏 보면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은 제로섬 게임이다.
계화도 산 위에 올라 바라본 풍경들을 나는 가슴 깊이 갈무려 넣고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그 곳에서 들은 이야기와 보았던 풍경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의 시각을 간섭하고 교정시키려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때론 나를 불편하게도 할 것이고 때론 나를 다시 돌아보게도 할 것이다.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누군가 키가 우둑한 미국자리공을 외래종이라며 보이는대로 밟고 지나간다. 부질없는 짓이다. 미국자리공은 이미 씨가 열글어 제 풀에 툭툭 떨어지는 중이었다. 내 것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내 것이 중하면 남의 것도 역시 소중하다는 것은 왜 알지 못할까?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미국자리공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가 있다면 저 풀씨를 이 곳으로 옮겨 놓은 인간에게 있을 터였다.
산을 내려와 바닷가를 걸었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뭍으로 올라온 어선 한 척에 눈길이 멎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겐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제 자리를 벗어난 것들은 웬지 어색하다. 그 어색한 풍경을 보며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꽃들과 인사하느라 홀로 처져서 일행들을 놓쳐 버린 것이었다. 나는 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종종걸음을 쳐 식당을 찾아 들었다.
식탁엔 소라죽이 오르고 우리는 맛난 소라죽으로 허기진 속을 채웠다. 누군가 소주 1 병을 시키고 이야기의 허리를 끊고 작별의 시간이 가까웠음을 알려준다. 전국에서 모인 풀씨들이 이제 저마다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어쩌면 쉽게 이 곳의 시간들을 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오감으로 느꼈던 이 곳의 풍경들도 시간의 모래가 좁은 대롱 속을 빠져나가듯 우리의 기억 속을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 곳에 모였던 이유만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백합 조개를 사기 위해 어판 장에 들렀다. 어판장엔 백합 조개 선별 작업을 하느라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그레를 끌며 조개를 잡던 아주머니들이 큰 놈은 큰 놈대로, 작은 놈은 작은 놈끼리 바구니에 골라 담느라 구경하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갯비린내가 물큰한 어판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손엔 백합을 담은 꺼먼 봉다리가 하나씩 들려 있다.
어판 장 한 켠에 개펄에서 죽은 조개껍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죽음은 후각적이라 했던가. 훅하니 코를 스치는 갯내음이 독하다. 하룻밤을 지샌 인연들과 일일히 악수를 나누고 버스에 올랐다. 풀꽃세상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깜빡 깊은 잠에 빠졌다. 저마다 다른 무늬를 지닌 백합꿈을 꾸고 싶었는데 꿈 없는 잠을 깨었을 때 차는 휴게소에 닿아 있었다. 풀꽃 세상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길, 몸 어딘가에 뻘 흙이 묻은 것처럼 갯비린내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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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벌님, 그때의 풍경이 다시 다가옵니다.
사람, 장소, 자연물..만나는 인연들마다 아이의 눈으로..
흰벌님의 조용한 시선이 아직 그 풍경 안에 묻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듯 1박2일의 우리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 너무 감사합니다.
짧지않은 글인데도 한줌에 쑤~욱 정말 행복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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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앙~~너무너무 감동적입니다. 선정회의 때 일들이 조목 조목 생각 나는 걸요?
고맙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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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다른 무늬를 지녔다는 백합을 읽는 듯이 참으로 길고 긴 장문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재미있게 그 때 당시의 흰벌님의 모습 그대로를 떠 올리면서 벅차도록 감동적인 낱말 하나하나가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 모두의 1박2일이 이렇게나 길고 긴 사연들과 함께 했다니 꼭 흰벌님께서 꾸지 못하셨던
백합꿈처럼 억바이 아름답고 이뿌게만 그려 주셔서 하나의 풀씨로서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흰벌님!
그 언제 또 다시 뵐 그 날을 기다려 보며 이단아 골룡풀 잘 모르지만 하나의 풀씨로서 그 날 1박2일을
함께 했었기에 이렇게라도 송구스럽도록 미안하게 아는 체 인사만을 여쭙고 물러납니다.
이 담에 다시 뵐 그 날까지 아니 그 언제까지라도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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